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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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역사상 '''첫 번째 FIFA 월드컵.''' 개최국 대표팀인 우루과이 대표팀이 초대 우승팀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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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월드컵의 홈팀이자 우승팀인 당시의 우루과이 대표팀은 아주 초강력한 팀이였다. 이 당시의 우루과이는 다른 국가들과 축구 실력이 너무 심하게 차이날 정도로 초강력함이 극에 달했는데 그나마 이 우루과이의 라이벌이라고는 남미에서 아르헨티나밖에 없을 정도였다.[1]
월드컵이 생기기 전 축구 최고의 무대는 올림픽이었는데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 두 대회를 연패했었고, 그 주축 멤버들이 대부분 월드컵에 나갔다. 그 주축 멤버들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80년 가까이 우루과이 A매치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던 엑토르 스카로네, 중원의 살림꾼이자 흑진주 호세 안드라데, 그리고 우루과이의 수비의 핵. 우루과이, 그를 넘어 역대 최고급의 주장이자 첫 월드컵 우승 주장인 호세 나사치 등이 모두 올림픽 2연패의 멤버들이다.
1930년에 개최된 첫번째 FIFA 월드컵으로, 지금의 월드컵과 비교해 보면 전반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월드컵'''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어느 월드컵 보다도 부가가치가 높은 월드컵이 되었다.
2. 지역 예선
이 대회는 첫 월드컵이라서 홍보 차원에서 지원하는 모든 팀들에게 지역예선 없이 전부 본선에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우루과이에서 개최된다고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유럽의 보수세력들은 월드컵을 아예 저질대회로 취급하면서 불참을 유도했고[2] 이에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이 말려들어 유럽의 대다수 국가가 불참했으나, 그나마 쥘 리메의 조국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거의 데꿀멍 수준의 간청으로 참가해준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참가했다. 말 그대로 쥘 리메는 유럽 각국을 돌며 제발 월드컵에 참가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사재를 털어서 맛있는 것도 잔뜩 사줬다. 현재 시점에서 월드컵에 한 번 출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3. 대회 엠블럼·마스코트·공인구
3.1. 엠블럼
당시 마스코트나 공인구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3.2. 우여곡절
당시 우루과이 정부에서 선수들의 체류비용과 교통비 등 부대비용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해서 일단 우루과이가 개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긴 했으나... 민간 항공이 개척되지 않았던 당시에 유럽에서 남아메리카까지는 배편으로 몇 주일에서 달포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그 먼 거리를 항해해야만 하는 부담 때문에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불참했다는 점이다.[4] 결국 쥘 리메와 우루과이 정부가 앞장서서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킨 끝에 유럽팀 전원불참은 간신히 모면했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는 왕이 직접 선수들의 직장과 접촉해서 그들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 종사할 수 있게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공인구가 정해지지 않아 각국 대표팀들끼리 서로 자국의 공을 사용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특히 결승전이 가장 극심했는데 그래서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제 축구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 축구공을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에는 아르헨티나가 2대1로 이긴 채로 끝났지만, 후반전은 우루과이가 3골을 넣어 2대4로 우루과이의 역전승으로 끝난다.
4. 대회 진행
현재는 개최국이 개막전을 하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5] 우루과이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쥘 리메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개막전을 우루과이의 첫 경기인 우루과이 대 페루 대신 프랑스 대 멕시코로 정했다. 그런데 원래 16개 팀 이상 초청해서 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남미의 팀까지 다 합쳐도 13개 팀밖에 출전하지 않아 조별리그 직후 준결승을 치루는 형국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역대 월드컵 최소관중경기가 나왔으니... 바로 조별리그 페루 대 루마니아의 경기 되겠다. 이 경기에서 관중의 수는 불과 300명에 지나지 않아 역대 월드컵 역사상 최소관중경기가 되었다.[6]
4.1. 조 편성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4강 진출국. 순서는 조별 리그 순위.
4.2. 결선 토너먼트
5. 출전선수 명단
6. 기록실
첫 월드컵이니 만큼 당연히(...) 첫 기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 월드컵 첫 경기: 프랑스 vs 멕시코[8] (개막전)
- 월드컵 첫 승리: 프랑스, vs 멕시코(개막전)
- 월드컵 첫 패배: 멕시코, vs 프랑스(개막전)
- 월드컵 첫 득점: 뤼시앵 로랑(프랑스), vs 멕시코, 19분(개막전)
- 월드컵 첫 페널티 킥 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vs 아르헨티나, 42분(조별 리그)
- 월드컵 첫 멀티골: 앙드레 마쉬노(프랑스), vs 멕시코, 43분&87분(개막전)
- 월드컵 첫 해트트릭: 버트 파테노드(미국), vs 파라과이(조별 리그)[9]
- 해트 트릭
- 월드컵 첫 클린시트: 지미 더글러스(미국), vs 벨기에(조별 리그)
- 월드컵 첫 자책골: 마누엘 로사스(멕시코), vs 아르헨티나, 51분(조별 리그)
- 월드컵 첫 퇴장: 플라시도 갈린도(페루), vs 루마니아(조별 리그)
- 최다 득점 경기: 아르헨티나 6 vs 3 멕시코(조별 리그)
- 최다 득점차 경기
- 월드컵 최초 역전승: 우루과이 0 vs 1 유고슬라비아 → 우루과이 6 vs 1 유고슬라비아(준결승)
- 월드컵 첫 결승전 득점: 파블로 도라도(우루과이), 1930년 7월 30일, vs 아르헨티나, 12분
- 무득점팀: 볼리비아
거기에 '''역대 월드컵 개최 기간중 가장 추웠던 월드컵'''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전 참조.
7. 결과
'''1위 - 우루과이'''
2위 - 아르헨티나
4강 - 미국[10] , 유고슬라비아
7.1. 수상
- 득점왕 - 기예르모 스타빌레
- 페어플레이상 - 아르헨티나
7.2. 베스트11
8. 뒷 이야기
- 우루과이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우승 멤버이자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안드레스 마살리[13] 가 통금 시간을 어기고 부인과 데이트를 즐기다 걸렸다. 마살리는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그렇게 마살리를 대신하여 나간 골키퍼가 엔리케 바예스테로스였고 그는 초대 월드컵 우승팀의 주전 골키퍼가 되는 영광과 함께 대회 최우수 골키퍼가 되었다.
- 우루과이는 이 대회 4번의 시합에서 15골을 넣어 경기당 평균 3.75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월드컵 우승팀 중 최고의 기록이다. 역대 국가대표 팀 중 자타공인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도 이 기록에는 미치지 못한다.
- 축구 선수들이 해외의 클럽에서 뛰는 것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시기라 거의 모든 선수들이 자국 리그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는 이반 베크 등 3명의 선수가 프랑스 리그에서, 페루에서는 훌리오 로레스가 멕시코 리그의 클루브 네칵사에서 활동하였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첫 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배에 마구잡이로 탑승하여 정원초과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는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 이 월드컵은 오직 몬테비데오 단 한 곳에서만 진행되었으며 월드컵 경기를 진행한 경기장도 에스타디오 포시토스, 에스타디오 파르케 센트랄, 그리고 결승전을 치룬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이렇게 3곳 뿐이었다. 주경기장이었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가 월드컵이 열리는 도중인 7월 18일에 완공이 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오직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한 곳에서만 치뤘다. 그러다보니 1조에서는 칠레와 프랑스가 경기를 끝낸지 30분만에 같은 구장(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다음 경기인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는 후안 호세 트라무톨라와 프란시스코 올라사르의 2명 공동감독 체제였는데 이 중 트라무톨라는 1902년 생으로 만 27살[15] 이었으며 이로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축구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16] 심지어는 팀의 미드필더인 후안 에바리스토, 아돌포 수멜수, 공격수인 카를로스 스파달로와 동갑내기였고 같은 팀의 미드필더인 루이스 몬티보다 1살, 공격수인 나탈리오 페리네티보다 2살, 수비수인 라몬 무티스보다 3살이 어렸다. 그리고 옆동네 칠레에서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당시 칠레의 감독 오르트 죄르지는 1901년생이었지만 수비수 중 울리세스 포이리에르는 1897년 생으로 당시 참가한 선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이 차이로만 따지면 칠레쪽이 더 심했다.[17][18]
- 아르헨티나 대 프랑스 전에서의 부심 2명은 멀쩡한 참가국인 볼리비아의 감독 울리세스 사우체도와 루마니아의 감독 코스텔 러둘레스쿠였다. 한술 더 떠 나중에 사우체도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에 주심을 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페널티 킥을 3개나 불었다. 또 결승전에서도 선심을 보았다. 하지만 모두 볼리비아와 루마니아와는 다른 조에 소속된 팀들의 경기였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 멕시코의 수비수 로사스는 1912년 생으로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 18살에 불과하였다.[19] 하지만 월드컵 최초이자 초대 월드컵의 유일한 자책골을 기록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20]
- 브라질은 월드컵 2조 첫경기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이전에 5년 가까이 A매치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이것이 브라질이 무기력하게 탈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 원래 이 대회 득점왕인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주전 선수가 아니였다. 그러나 팀의 주전 공격수이자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중간고사를 봐야 한다면서 잠시 귀국해버리는 바람에(...) 그 땜빵으로 들어간게 스타빌레였다.
- 첫 우승팀인 우루과이 대표팀의결승전 출전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는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로 1984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 그리고 2010년 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였던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100살(!)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현재 더 이상 이 대회에서 참가했던 선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9. 대회 이후
첫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놓친 아르헨티나는 머리끝까지 빡쳐서 결국 자국에 있는 우루과이 대사관을 때려부수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으며 우루과이와는 1년 정도 단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서 독립한 나라이다.[22]
그 다음 월드컵이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자 우루과이는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 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앙갚음으로 불참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및 국내문제로 무려 20년 동안이나 월드컵에 불참하고 말았다. 비록 20년 후에는 다소 삐걱거리는 면을 보여주었지만 우루과이는 브라질에서 다시 한 번 월드컵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우승을 놓친 브라질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루과이는 그 대회 이후로 현재까지 우승이 없다.
[1] 당시는 남미와 유럽이 다른 세계나 마찬가지였고, 올림픽이나 투어 경기 정도를 제외하면 타 대륙과의 시합은 거의 없었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우루과이 또는 아르헨티나와 최고의 흥행 카드를 만들 수 있는 팀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우루과이는 1953년에야 첫 시합을 가졌다. 참고로 1940년대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콧대높은 자부심으로 해외와의 교류를 사실상 차단했고 자신들이 가장 강한 팀이란 허황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이 당시 홈팀의 유리함이란 엄청난 것이었는데 잉글랜드는 거의 안하지만 가끔하는 거의 대부분의 a매치를 홈에서 했고 홈에서는 무패행진 중이였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자부심이 존재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자부심은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고 예선탈락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산산조각 나게 된다. 홈에서의 무패행진은 1953년 헝가리 국가 대표팀에게 박살나게된다.[2] 게다가 줄 리메는 프랑스인이고 결국 프랑스의 주도로 인해 월드컵이 개최된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증오하던 잉글랜드는 더더욱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3] 이 당시 월드컵의 공식 명칭은 'FIFA 월드컵'이 아니라 '쥘리메 배 세계 축구 선수권대회'였다.[4] 실제로 프랑스 대표팀도 대서양을 건너는데 열세 밤이 지나서야 간신히 우루과이에 도착했다.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팀들이 떨어진 것으로 미루어보면 결과론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상술했듯 이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항공편 등의 교통수단이 매우 미비했던 때라서 홈 어드밴티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이 후에 열린 모든 월드컵에서도 남미 지역에서 열린 대회는 모두 남미 대륙에서 우승 팀이 나왔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 가서야 독일이 4강전에서 브라질을 압살하고 결승에 올라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림으로써 징크스가 깨진다.[5]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에는 전 대회 우승국이 개막전을 치렀다.[6] 피파의 공식 보고서에는 2549명이 왔다고 되어있기는 하다만 대부분의 다른 자료들에는 이 경기에 300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10년전의 피파 보고서에도 역시 300명이 왔다고 써 있었다. 이 경기가 열렸던 에스타디오 포시토스가 수용인원 천 명 정도의 미니구장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7] 현재와 같이 조 이름에 알파벳이 쓰이기 시작한 대회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이다[8] 같은 시각 4조에서도 미국과 벨기에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1조와 첫 골의 프리미엄으로 흔히 이 경기를 첫 경기로 이야기한다.[9] 본래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나 2006년 11월에 공식 수정.[10] 일단 미국은 3위로 인정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참조[11] 그런데 스타빌레는 이 193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단 한차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4경기 출전 8골로 이 위대한 선수의 A매치 기록은 끝났다.[12] 우루과이는 초대 월드컵이 열리기 100년 전인 1830년에 브라질에서 독립하였다.[13] 마살리는 허들에서 남미 챔피언을 차지한 적도 있는 뛰어난 육상선수이기도 했다.[14] 바스크 출신의 프랑스 대표 수비수. 1929년까지 스페인에서 뛰었지만 대표팀 생활은 프랑스에서 다했다. 1930년 3월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40m짜리 중거리슛을 꽂아넣어 유일한 A매치 득점을 해냈다고 전해진다. 통산 A매치 16경기 출전 1골[15] 10월 21일이 생일인지라 아직 생일이 자니지 않아서 만 나이로는 27살이 맞다.[16] 트라무톨라는 유명 하프백이자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올라사르와는 다르게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기술 감독의 자리에서 올라사르를 보좌했었다. 그 이후에 트라무톨라는 감독 자리에 재미를 붙여 아르헨티나 프로팀의 감독 자리를 맡기도 했다.[17] 이런 경우가 현대의 클럽팀에서도 가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티아스 잠머와 위르겐 콜러. 둘 다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잠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잠머가 2000년에 수석 코치를 거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위르겐 콜러는 아직 현역이었다. 콜러가 잠머보다 2살 위.[18]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1981년 생의 차두리가 코치로 부임했는데 1979년 생의 이동국이 선수로 발탁되었다.[19] 다만 브라질에 로사스보다 2달 늦게 태어난 카르발류 레이치가 있어서 초대 월드컵 최연소 선수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실패했다.[20] 옛날 기록으로는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에서 파라과이의 곤살레스가 자책골을 기록해서 기록을 양분했지만 이것이 파테노드의 골로 수정되면서 로사스가 독박을 쓰게 되었다[21] 후보까지 영역을 넓히면 에밀리오 레코바로 1992년에 사망했다.[22]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기가 닮은 이유가 이것.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잊지 않고자 아르헨티나 국기를 모방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 쓰는 우루과이의 국기이다.